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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ihu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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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8 2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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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의 아들 바나바 (2012. 7. 18)
설교일 : 2012년 7월 18일(수) 수요기도회
본 문 : 사도행전 4 : 32 ~ 37 (신약 193)
제 목 : 위로의 아들 바나바

우리는 지난 주에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나누면서 두 가지를 기억하자고 했습니다.
한 가지는 어떤 일에 앞서 하나님 은혜가 우선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어야 믿음의 일들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믿음의 위치... 곧 하나님, 사람, 재물의 위치를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물, 물질의 자리는 내 머리 위가 아니라, 언제나 나의 발 아래라는 것을 잊지 말고
내 머리 위의 자리는 항상 하나님께 두고,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36~37절의 바나바에 대한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살펴보아도 그런 일들을 누가 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모든 재산을 바친 그 누구도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일로 인해서 칭송을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요즘 시대에 누군가 집을 팔고, 밭을 팔아 헌금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이름과 금액을 광고에 내고, 박수를 받게 했을지 모릅니다.

언젠가 선교지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 현장을 둘러보다가 한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선교센터를 지었다고 해서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복도에 딱 들어서는 순간 제 눈에 들어온 것은 각 방들의 이름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한글과 현지어로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앞에 있고, 그 뒤에는 그 방의 용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 도서관, ○○○ 교실, ○○○ 컴퓨터실...
그것을 본 순간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영광돌리면 안될까?
현지 실정에 맞게, 그 곳 목회자와 성도들에 의하여 이름을 짓게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선교센터를 짓는 일에 많은 재정이 필요했겠고,
그래서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바른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왕이면 이름이 알려지는 자리에 가려고 하고,
어떤 일을 할 때 이름값 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디에선가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우리는 상처도 받고, 기분도 상해합니다.

오래 전 한 교회에서 이 부분 때문에 목사님께서 참 힘들어 하시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2가지 사건인데,
한 사건은 어느 날 원로장로님이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구 담당 목사님이 알아 보니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 주에 예배당 안에 작은 건물을 짓고, 입당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위로 테잎을 자르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실무를 맡았던 부목사님과 장로님께서 다른 분들의 이름은 다 부르셨는데,
실수로 한 원로장로님 이름을 빠뜨리셨습니다.
그 일이 서운하셔서, 나를 알아주지도 않는 이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에 나가시겠노라고...
그래서 담임목사님과 담당 장로님께서 심방 가셔서 양해를 구하고, 위로하여 다시금 나오시도록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실무를 맡았던 분들의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어른께서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괜찮다고, 별 일 아니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미안해 하고, 더 존경받으셨을텐데...하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또 한 사건은 예배당 로비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서 그 곳에 있는 오래된 대형 거울을 치워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치우려고 하자, 성도님들이 그거 치우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 대형거울은 예배당을 지을 때 아무개 권사님이 해 놓으신건데,
그 분이 한 성격하시기 때문에 그 분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거 치우면 교회가 시끄럽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교회 안에 있던 많은 성물들이 보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 기증한 사람과 날짜가 적혀있었습니다.
옮기거나 오래되어서 버리려고 하면, 내가 기증한 것을 왜 옮기냐고, 버리냐고...
그래서 그동안 한 번도 그것들을 옮기지 못했답니다.

그렇게 이름을 내는 것이 시작할 때나 구입할 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처분할 때나 바꿀 때는 참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익명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조금 서운할지 몰라도
사실은 나를 위해서나, 내 믿음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도 익명으로 하는 것이 여러 가지면에서 훨씬 유익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드렸으면,
나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내고
그 다음은 교회가 의논하여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교회는 또한 귀하게 드린 분의 마음을 헤아려 기도하는 가운데 잘 활용해야 할 책임이 있구요.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 모르게 하는 것이 좋은데,
오늘 말씀에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유독 바나바의 이름만 적혀있습니다.

36~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왜 바나바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혹시 바나바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은 것을 드렸기 때문일까요?
그랬다면 금액도 함께 기록이 되었었겠죠...
그러므로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곧이어 나오는 5장에서 바나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나바 이야기는 오늘 말씀에 나온 이후로, 9장에 가서야 나옵니다.

그래서 더욱 바나바라는 사람의 이름이 뜬금없이 기록된 것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그 궁금증은 오늘 말씀이 아닌 이후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말씀 속에서 해소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바나바는 바나바 스스로보다는 사도 바울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예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시도행전에 9장에 가면 유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동안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잡아들이고, 핍박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사도로 180도 변합니다.
그 길로 다메섹에 들어간 그는 놀랍게도 자신이 부정하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유대교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 정도 머물면서 경건의 훈련을 한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사도들을 만나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인들은 그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했던 사람인 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소탕하기 위해 위장으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때 바울이 진심으로 회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보증해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바나바의 신원보증에 의해
바울은 비로소 예루살렘 교회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교인들 또한 그런 바울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바울은 고향인 다소로 내려가 그 곳에서 10년 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그 때 바울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였던 바나바가,
교회목회나 선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바울을 동역자로 불러 준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주님의 명령을 좇아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안디옥교회에서 세계 선교의 첫 발을 내디딜 때 그 팀의 팀장 또한 바나바였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바울의 인생과 사역에서
그것도 가장 중요한 길목마다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어쩌면 바울에게 바나바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바울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는 오늘의 본문 속에서
유독 바나바의 이름만 공개되어 있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도 전에, 오히려 핍박하고, 부정하고, 대적하고 있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오래 전부터 그의 인생 앞 길에 이미 바나바를 예비해 두셨음을
바울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바나바를 예비해 두신 것입니다.

36절은 바나바란 이름의 뜻을 ‘위로의 아들’이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격려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초대 교회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심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누군가를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은
그 누구의 위로와 격려보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면서도
억지로나 의무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
기쁨과 감사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고난이 있고, 죽음의 문턱에 있지만,
창세전부터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나를 위해 환경과 사람을 예비해 두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예비해 두신 사람과 환경이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바울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찬송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믿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응답...
나를 먼저 믿어주신 하나님의 믿음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평생을 그 하나님의 믿음에 부응하는 살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12~13절을 통하여 고백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똑같이 그렇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를 먼저 믿어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도 전에
우리 곁에 반드시 있어야 할 많은 바나바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위로와 격려로 우리의 삶을 영원토록 책임져 주십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아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늘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우리 곁에 이미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예비해 두셔서
내 삶에 어렵고, 힘든 순간순간마다 그 바나바들을 통하여 새롭게 일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우리를 향하신 그런 하나님의 믿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풍부에 처했다고 교만하지 말고,
비천과 궁핍에 처했다고 절망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내게 어떤 상황이 주어졌든
현재의 상황은 창세전부터 나를 믿으시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기에 주셨음을 믿고 나아가십시다.

또한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위한 생명의 통로,
누군가를 위한 바나바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결과가 이 시대를 위한 사도행전이 되게끔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고백을
어떤 상황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믿으시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응답함으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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