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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ihu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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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8 09: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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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에 대한 감사, 기대와 소망 (21. 7. 4 맥추감사주일)
설교일 : 202174() 맥추감사주일 설교

본 문 : 빌립보서 1:12~21 (신약 318)

제 목 : 미래에 대한 감사, 기대와 소망

 

보통의 사람들은 미래 지향적이기 보다는 과거지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 , 한과 같은 것들, 반대로 기쁨과 감사와 같은 감정들은

거의가 다 과거에 일어난 일 때문이거나 사람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런 감정들을 갖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들의 표현보다는 불안이라고 하는 또 다른 마음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 이유는 미래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불확실한 시간이기 때문이죠.

 

그래도 지금의 형편이 괜찮고, 그래도 살만하고, 건강하면 그런 불안은 훨씬 덜 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도 어렵고, 가진 것도 없고, 건강조차 담보할 수 없으면

미래를 향한 우리의 불안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감사의 기초가

지난 시간 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시간들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형편이 어려웠고, 가진 게 없었고,

삶이 고단했으며, 건강이 우리 삶을 위협 했습니다.

러나 그 시간들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그것이 우리 삶에 소중한 경험이 되어,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불안이나 초조가 아닌 감사의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경험이란 것이 그렇죠?

좋은 경험을 하면, 앞으로 똑같은 상황이 예상될 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일에 나쁜 경험이 많아 보세요. 아직 오지도 않은 일에 걱정과 근심부터 합니다.

왜요? 같은 일에 안 좋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과거에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경험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좋은 감사의 경험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만약 우리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이 아닌,

감사로 준비하고, 열어간다면, 우리는 미래를 기대함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울이라는 사도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를 흔히 옥중서신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도였던 바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에 따라 말씀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말씀인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잠깐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결국 로마에까지 압송되어

로마의 감옥에 갇힌 지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입니다.

물론 이 때의 감옥이 그 동안 잠깐 잠깐 갇혔던 지하 감옥이 아니라,

가택연금처럼 약간의 자유가 주어진 감옥이었지만,

자유가 없고, 집밖을 나갈 수 없는 점에서는 감옥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전도하고 개척했던 일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이 때 바울은 나이가 상당히 들었던 상태였습니다.

 

러니까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습니.

그런 바울을 향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울 개인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요, 그의 투옥이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 큰 지장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지도자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복음은 더 이상 증거 되지 못할 것이고, 교회도 위축될거라고 여긴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그런 그들의 염려를 기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만 2년 동안 바울은 자신을 지키는 시위대 병사들은 물론

자신은 나갈 수 없지만, 사람들이 집에 드나드는 건 허용했기 때문에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하였고,

비록 자신은 매임 가운데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널리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처럼 바울의 매임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아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바울 한 사람의 투옥은 로마의 관원과 로마에 사는 사람들, 일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또 다른 놀라운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의 투옥이 복음을 로마라고 하는 지역 가운데 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로마의 길은 세계로 통하였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세계로 그 복음을 전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의 그런 모습과는 달리 감옥 밖에서 바울을 바라보는 모습을 달랐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 밖에서는 두 종류의 일꾼들이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는 참된 일꾼으로 바울에게 잘 하고, 그와 협력하는 일꾼이요,

다른 하나는 투기와 분쟁 등 불순한 의도로 전도하는 전도자들입니다.

 

참된 일꾼들은 옥에 갇힌 바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의 매임이 복음을 위함으로 알아

그를 존경하며 선의로 대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은 바울의 사명을 이해하고, 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위해 투옥되어 있는 바울을 동정은 못할망정

그를 괴롭히려는 불순한 마음을 품은 악의의 일꾼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을 하며

옥에 갇힌 바울의 마음을 괴롭게 했습니다.

예컨대, 복음을 믿고 따라도 구약의 율법은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무시한 바울을 대놓고 반대한 것이죠.

만약 바울이 옥에 갇히지 않았다고 하면, 그들의 말에 반박했겠지만,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자기들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바울이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들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거나, 돈을 벌거나, 인기를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든,

참된 마음으로 선하게 복음을 전하든

어쨌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자기는 이래도 기쁘고, 저래도 기쁘다는 겁니다.

복음 중심으로 사는 사도의 관대한 태도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든, 배척하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여부가 그의 기쁨과 슬픔을 결정지우는 열쇠라고 말합니다.

 

악의든, 선의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만 하면 자기는 상관없고,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죠.

또한 기뻐하리라는 미래형으로 현재에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두 모습의 전도자 사이에 끼어있는 사도 바울은

지금도 그런데 앞으로도 그런 사정들이 있을 것이고, 더하겠지만, 각오하고

그 때에도 기뻐할 것을 미리 다짐하는 것이죠.

 

19절부터는 바울의 간증이 깊어집니다.

즉 로마에서 두 모습의 전도자 사이에 끼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것을 다짐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그것을 초월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먼저는 환영과 배척을 초월했고, 이제는 삶과 죽음을 초월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을 환영하든, 배척하든, 혹은 살든 죽든 외적인 모든 환경을 중요시 하지 않는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간절한 소망이란 뜻은 목을 빼내어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이죠.

아무 일, 즉 자기를 모략중상하는 악의의 전도자나, 자기 몸을 결박하고 있는 로마의 관원도

자신의 마음을 부끄럽게 할 조건이 못 되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라는 것은 살면 산 제물이 되고, 죽으면 죽음의 제물이 되어

태연한 순교의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려는 바울의 결단이 묻어 있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의 삶은 일반 사람들처럼 자기를 위한, 가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아가 일반 성도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동기요, 힘이요, 목적이요, 그의 생각이요, 이상이요, 전부였습니다.

실로 그는 죽고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생명관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에게 있어 죽음은 지상의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고,

육적인 불완전의 생애에서 참되고 완전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죽음에 관하여 믿음 안에서 달관한 그의 모습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일반 불신자들처럼 무조건 삶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염세적 과격파 신자들처럼 조급히 죽음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라보는 완숙하고 대담하고 철저한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사도 바울은 지금 상황적으로 보면 감사는커녕 절망적 상황 아닙니까?

로마 감옥에 2년째 갇혀 있죠, 오는 사람은 만나도 바깥출입은 할 수 없죠. 나이도 점점 들어갑니다.

지런히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성도들을 가르쳤던 일들을 지금은 하나도 할 수 없습니.

게다가 밖에서는 바울을 반대하고, 비방하는 거짓 전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죠.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지금도 기뻐하고 있고, 앞으로 기뻐할 거라고 합니다.

삶에 대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품고 삽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죽는 것도 자신은 너무 좋고,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바울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이유나 죽어야 한다면 죽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바울이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모를 정도로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미래는 누구에게나 불확실합니다.

더더군다나 지금 내 삶이 불확실하면 불확실할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는 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불확실한 앞날에 불안과 초조 대신 기대와 소망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된 삶,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도 기쁠 수 있고,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좋아해주고, 환영해도 기분이 좋지만, 싫어하고 미워해도 거기에 마음 쓰지 않고 살게 됩니다.

하는 일이 잘 되든, 못되든, 건강하든 건강에 어려움이 오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삶...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삶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당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전에 노인교실을 할 때 한 어르신이 했던 말이 가끔 떠오릅니다.

옛날에는 내가 팔팔했는데, 이렇게 나이 들고, 몸이 아프니, 관광도 못 따라가고, 너무 억울하다고...

나이 드는 것과 아픈 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나 중심의 삶을 살면, 우리 삶은 시간이 갈수록 속상할 일들만 만나게 됩니다.

자녀 중심의 삶을 살면, 자녀 때문에 마음 상하는 시간들이 오고,

건강 중심으로만 살면, 건강 때문에 낙심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면, 나의 모든 형편과 상관없이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으며,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세요. 기뻐할만한 일이 얼마나 되나요?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낙심되고, 걱정되고, 짜증나는 일들, 불안한 일들 투성이입니다.

그런 것들이 해결되면, 낙심과 걱정과 짜증과 불안이 사라질까요?

천만에요... 잠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새 더 큰 낙심거리와 걱정거리와 불안거리들이 몰려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도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똑같이 불안하고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떠한 삶의 형편 가운데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지만, 기대와 소망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지나온 삶에 대한 감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기초만 지어놓고 집을 짓지 않는다면 그 기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나온 삶에 대한 감사가 중요하고, 감사의 기초이지만,

지나온 삶에 대한 감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그 기초 위에 남은 삶을 기대하며 믿음의 집을 지어 가십시다.

맥추감사주일인 오늘, 지나온 삶에 대한 감사라는 기초 위에

다가올 미래에 함께 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가운데,

차원이 다른 감사를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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