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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ihu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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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10:5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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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함 (21. 6. 16 수요기도회)
◉ 설교일 : 2021616() 수요기도회

◉ 
본 문 : 고린도후서 6:6 (신약 291)

◉ 
제 목 : 깨끗함

 

난주에 우리는 바울이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수없이 많은 일들 중 네 번째로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라는 부분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수고로움이란 생계를 위해서 일했던 것을 의미하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지만,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필요한 비용과 의식주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감당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바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재정적으로 풍성하지 못했고,

또한 자연스럽게 자지 못함먹지 못함이라는 고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누려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그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진 고난이 많은데,

거기에 스스로 이런 고난까지 자처했으니,

그가 겪은 고난의 깊이와 넓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좀 더 편안하거나, 나은 환경 가운데서

복음전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바울은 늘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고, 수고로움을 자처했기에

다른 사도나 제자,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고난 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그런 모습 가운데서 권리 포기를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믿음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지니고 있어야 할 중요한 믿음의 모습이 바로 권리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기가 살아서 열심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기는 죽고, 오직 주님만 드러내는 사람이며,

그것을 위하여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믿음의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란 나의 권리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권리에 순종하여 사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것을 그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조건이자, 과정인데, 알고 보면, 이것들이 바로 권리 포기라고 했습니다.

내 의견, 내 주장, 내 생각, 내 욕심, 내 계획, 내 야망에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대접받을 권리, 인정받을 권리, 칭찬받을 권리, 누릴 수 있는 권리, 받아야 할 권리,

취해야 할 권리들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권리들을 포기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내가 그 말씀 앞에 신을 벗는가를 보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신을 벗으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고,

그런 나를 통해 하나님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고 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찾는 이 시대에

오히려 내게 있는 권리를 포기함으로, 우리 주님의 귀한 쓰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도 놀라운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늘 말씀은 사도였던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유지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내적인 증거에 관한 말씀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앞선 말씀들에서 바울이 많은 고난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반적인 고난인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

다른 사람에 의하여 겪게 된 고난인 매 맞음, 갇힘, 난동,

그리고 스스로 자처한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이런 고난들을 숱하게 받으며 지금까지 지내고 있는데,

그 모든 고난들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가 6절 이하에 나오는 것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못된 세균이 내 몸에 들어와도 내 몸에 그 못된 세균을 이겨낼 좋은 세균이 더 많다면,

못된 세균은 내 몸을 아프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 봐도 견디기 어려운 심각한 고난을 겪고 있지만,

바울 안에 그걸 이겨낼 만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 고난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으며, 주어진 고난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무언가가 6절과 7절 전반절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는 사도의 삶을 위협하는 외적인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내적인 생명력들이죠.

사도로서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의 근거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의 이유들입니다.

 

1. ‘깨끗함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려는 행동과 의도가 순수하고 깨끗했다는 것입니다.

엇을 하든지 아무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자부심과 관련이 깊습니다.

복음을 전했던 그 마음과 의도가 순수하고, 깨끗했기 때문에,

바울은 어떤 고난이든지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 사실 의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고, 멋진 일을 해도 그 의도가 불량하거나 나쁘다면, 그건 결코 좋고, 멋진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법을 무시하고 환경을 파괴하며,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돈을 버는 기업이 있다고 해 봅시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회사의 이미지가 안 좋아지자,

이 회사에서는 이미지 개선을 위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사회사업이나 사회봉사를 계획합니다.

런 일들을 통해 사람들이 이 회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좋아졌다고 이 회사가 좋은 회사가 된 건가요?

그렇지 않죠. 이 회사는 자기들의 잘못과 죄를 감추기 위한 의도로 좋을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고, 좋지 못했습니다.

이 회사가 정말 좋은 회사가 되려면, 환경파괴를 멈추고, 환경을 보호하는 작업환경을 만들며,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수고에 합당한 보수와 복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단지 이미지 개선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관계 속에 사는 우리들이 가장 기분 나쁠 때가 언제냐 하면

상대방이 좋지 못한 의도로 내게 말을 하거나, 내게 무언가를 해 줄 때이며,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고,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거나,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안 그런 척 하고 그 의도는 숨긴 채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나를 대할 때입니다.

 

좋은 뜻과 의도, 생각을 끝까지 가지고 간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참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의도로 시작했다가, 좋지 못한 의도로 끝낼 때가 많기 때문이죠.

우리 주변의 좋은 사람들, 좋은 일들이 끝에 가서 그렇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좋은 뜻을 품고 시작한 단체나 사업이 결국 자리다툼이나 자신의 명예와 같은 엉뚱한 이유 때문에

중단되거나 분열되거나 본질을 잃은 채 이상하게 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다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때, 서로를 사랑하는 의도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혼할 당시의 처음 사랑과 의도만 간직하고, 기억해도 좀더 아름다운 관계들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 뿐만 아니라, 생업의 현장이나 우리가 관계하는 모든 관계 속에서

깨끗한 의도를 지닌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는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끗함, 순수함은 영적인 면, 신앙적인 모습,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모습 중 대표적인 것이 있다고 하면, 그건 깨끗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도의 순수함입니다.

예배를 드리든, 기도를 하든, 말씀에 순종을 하든,

내게 있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 예배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도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예배와 기도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의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만 행하는 것을 주님은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수님 시대에 수많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들었던 책망이 외식하지 말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들을 향해 속은 썩어 냄새나는데,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그 누구보다 잘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책망을 들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는 믿음의 행위에 그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죄인이라고 여겼던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회개기도 할 때,

예수님은 그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세리가 진심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뻐하셨던 이유도 같습니다.

윗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가족 안에서나, 생업의 현장에서 언제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았습니.

모든 형제들이 사무엘에게 선보이려고 갔을 때에도,

그는 들에 홀로 남아 주어진 양떼를 성심껏 돌보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는 좌우를 돌아보거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흔들리거나, 사울 왕이 자기에게 어떻게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인도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백성들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다윗이 춤을 추며 기뻐합니다.

이런저런 눈치를 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궤가 이제 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너무 즐거웠던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그런 순수함이 너무 좋으셨던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고 여깁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때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행위나 모습만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믿음의 행위나 표현이 아니라, 믿음의 중심과 의도를 보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처럼 믿음의 행위나 모습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냐하면, 그건 눈에 잘 띄거든요. 다른 사람들 앞에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의 의도는 하나님과 나 밖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 앞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지는가에 더 마음을 쓰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나 의도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 쉽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동일한 헌금함에 헌금을 했습니다.

금액으로 보면 부자가 많이 넣었고, 가난한 과부는 가난하니 당연히 적게 넣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

실과 다릅니다. 금액으로 보면 부자가 훨씬 더 많이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

그 이유는 %에 있습니다.

부자는 물론 금액은 크지만, 여유 있는 중에 얼마를 넣은 것이고,

가난한 과부는 금액은 적지만, 없는 중에 자신에게 있는 전부를 드렸다는 것이죠.

다르게 말하면, 부자는 가진 것의 0.01%를 드렸다고 하면, 가난한 과부는 100%를 드렸다는 것이죠.

 

이 말씀은 많은 금액의 헌금이 의미 없다거나, 부자를 책망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가 가진 것의 일부라도 많은 금액의 헌금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는 부자가 잘 했느냐, 가난한 과부가 잘 했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누가 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을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헌금의 의도요, 정신입니다.

 

우리는 깨끗하고, 순수함을 숫자로 표현할 때 %를 사용합니다.

같은 무게의 금이라도 99.9%의 순금과 18k의 금은 값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순금은 99.9%, 100%가 금이지만, 18k75%만 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것이 많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언제나 이 %를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예배를 드렸나, 안 드렸나, 주일성수를 했나 안했나, 기도를 했나, 안 했나,

말씀에 순종했나, 안 했나 이것이 중요했고, 그것이 내 믿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다면,

이제는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음의 행위에 %를 적용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주일성수하며 주일예배를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도록 잘 드렸는데,

그렇게 드린 내 모습, 내 의도, 내 마음, 내 중심이 깨끗하고, 순수했는지...

그저 주일이 되었으니 내 시간의 일부를 드린 건지,

아니면 기다리고, 사모하다가 내 시간의 전부를 드린 건지...

오늘의 예배를 %로 계산한다면, 나는 몇 %의 깨끗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 건지 살펴야 합니다.

 

매일 잊지 않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고 애를 쓰는 일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이제는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을 지속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드린 기도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이 있는가? 있다면 몇 %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오늘 삶 속에 적용하고 있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다른 어떤 개인적인 이유나 목적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의 순종을 %로 계산한다면, %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가?

이제부터는 하고 안 하고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 하고 있는 지에까지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고, 안 하고의 문제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까지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을 탓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고 하나님 앞에 죄송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100%의 깨끗함을 드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없는 대로 100%의 순수한 마음과 의도로 행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남은 한 주간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깨끗함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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